Mountains[白頭大幹]

[스크랩]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백두대간 고개를 넘는다”

Eugene Lee 2018. 3. 13. 20:49

 

 

■ 산행일자 : 2009년 9월 27일 일요일

■ 산행경로 : 이화령 - 조령산 - 신선암봉 - 깃대봉 - 조령3관문 - 마역봉 - 부봉 - 주흘산갈림길 - 평천재 - 탄항산 - 하늘재 - 미륵리

■ 산행거리 : 21km 내외

■ 산행시간 : 15시간 (후미기준 식사 및 휴식포함)

■ 산행인원 : 대전2030산악회 백두대간종주대 22명 

Mariah Carely - Hero

 

어두운밤 이화령에 도착한다. 이화령은 산자분수령의 원리에 따라 한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을 나누는 경계선이며,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을 잇는 해발 548m 높이의 고갯길이다. 이화령이 언제 처음 개척되었는지는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문경새재보다 오히려 더 오래 되었을지도 모른다. 과거에 하늘재가 주통로로 이용될 당시 이쪽에서도 어떠한 형태로든 통행로가 있었을 것이다.


이화령 고개를 옛 기록에는 이화현이나 이화이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일제때 신작로가 나면서 일본식 지명으로 이화령이란 엉뚱한 이름이 지금은 터를 잡고 사람들의 입속에 굳어져 가고 있다. 이화령은 배꽃고개라는 뜻으로 그 이름이 몹시 예쁘지만, 일본인들이 험준한 조령을 넘는 불편함을 극복하기 위해, 그리고 동시에 우리 나라의 전통적 고갯길이었던 조령 즉 문경새재를 말살하기 위해 1925년 신작로를 내며 이화령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결국 이화령은 문경새재의 역할을 물려받은 근대적 도로로 2차선 아스팔트 포장이 되면서 우리나라 남북을 연결하는 국도 3호선으로 큰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10여년전 중부내륙고속도로 이화령터널이 개통 됨으로써 고개의 역사는 막을 내린다. 터널의 개통으로 이 길의 쓰임새는 줄었으나, 아무튼 현재 이 시점에서 가장 번화한 고개는 2천년이나 먼저 개척된 하늘재도, 영남지방의 관문이었던 문경새재도 아니다. 바로 거대한 터널과 국도와 고속도로가 뚫린 이화령인 것이다.


지난번 긴 구간을 마치며 단체사진을 남기지 못함을 아쉬워 하였는데... “백두대간 이화령“큰 표지석 앞에서 지난구간의 단체 사진을 촬영하고 산행을 시작한다. 시작되는 구간부터 가파르고 미끄럽다. 숨이 차오른다. 설상가상 앞사람 발자국의 흙먼지로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한다.

잠시 후 헬기장이 나타난다. 그리고 잠시 후 봉우리에 오르니 그곳도 헬기장이다. 진행방향 우측으로 멀리 마을에 불빛이 보인다. 저 불빛에서 왠지모를 밤 특유의 평온함이 느껴진다. 오늘따라 가을바람이 유난히 매섭다. 백두대간을 처음 시작한 것이 이맘때가 아닌가? 지리산에서 백두대간 산행을 시작한 후로 어언 일년이 지났다. 참으로 세월이 빠르구나.... 


조령산을 오르는 동안에 유난히 헬기장이 많다. 수직 암벽에 로프가 매어 있는 곳을 지나고 오르막을 지나니 조령샘이 나온다.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또다시 가파른 오르막을 지나니 조령산 정상이다.


조령산은 이번 구간에서 가장 높은 산인데 예상보다 조금은 빨리 당도한 듯 하여 마음이 홀가분하다. 조령 즉 문경새재를 품고있다하여 조령산인가? 안개에 가려 주변이 전혀 보이지가 않는다. 물론 안개가 아니더라도 이 어두운밤에 무엇이 보이겠는가? 정상 한구석엔 목재를 가늘게 깍아 세운 산악인 추모비가 쓸쓸히 조령산을 지키고 있다. 


지금부터 진행 해야할 조령3관문까지는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지난 속리산, 청화산, 대야산을 넘어오면서 수많은 위험지역을 통과 했건만 오늘 이곳 조령산에 비하면 어쩌면 예고편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급경사 내리막길을 내려가다 보니 계단길이 나온다. 그런데 계단에 흙이 패여 나가서 제대로 발을 디딜수 없는 상태이다. 계단이 아예 무너진 곳도 있다. 내려가기가 여간 까다로운게 아니다. 오르락 내리락 하는 길을 걸어가며 수많은 로프를 잡는다. 양옆으로 절벽인 지점을 지나기도 하고, 벼랑바위로 올라가 걸어 가기도 한다. 험한 암릉 구간을 지나고 솟아난 봉우리에서 뒤를 돌아보니 어둠속에서 지나온 조령산의 윤곽이 웅장하게 드러나 보인다.


계속해서 큰 바위 봉우리를 오르락 내리락 하며 조심스럽게 천천히 지나니 신선암봉이다. 신선암봉은 조령산 종주로의 중간에 위치한 암봉으로 주변 조망이 좋은 산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밤에 뭐가 보이겠는가? 저멀리 중부내륙고속도로와 아름다운 연풍마을에 야경이 눈에 들어온다.

 

 

이화령과 조령을 힘겹게 넘으면 하늘아래 첫 동네 연풍이 나온다. 연풍은 아름다운 산마을이다. 백화산에서 흘러오는 물줄기와 조령관문 아래의 수옥폭포에서 내려오는 두개의 개울이 만나 여울을 이루는 경치가 빼어나고 인심이 좋기로 소문난 동네이다. 또한 험한 산으로 둘러싸인 까닭에 그야말로 첩첩산중 고을로 유명하다. 그래서 속된 말에 “울면서 왔다가 울면서 가는 연풍 원님“이란 말이 지금까지도 전해 오는데, 울면서 오는 고충이야 짐작할 만한데 울면서 가는 까닭은 무엇일까?


양반댁 자제로 태어나 겨우 과거에 급제하여 현감 자리 하나 얻어 이제야 팔자가 피는가 하였는데, 연풍이 도대체 어디냐? 몇날 며칠 행차를 재촉해서 왔건만 사면팔방을 둘러 보아도 보이느니 산이며 시내 뿐이고, 첩첩산중을 헤치고 들어가보면 또 첩첩산중이니 무슨 놈의 팔자가 하필 이런 산간 벽지의 수령 노릇이란 말인가.... 한숨과 눈물이 번갈아 흘러나오는 것이 연풍현감 도임행차 풍경이다.


임기를 마치고 떠나자니 다시 기가 막히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평화롭고 행복한 나날이었던가? 비록 벽촌의 작은 고을이라고 하나 먹고 남을 만큼 물산 풍족하고, 민심은 검소하고 순후하여 현감을 어버이 따르는 듯하고, 백성들이 철따라 정으로 가져오는 잣죽의 별미며, 송이버섯 안주에 향기로운 국화주, 새재의 타는 듯한 단풍.... 이 고을을 떠나 어딜 가면 이런 낙원을 구경할까 싶어 발걸음이 무거워 눈물을 훔치며 옷깃을 적셨다.


연풍은 오지이고 험지인 까닭으로 천주교 박해를 피해 은거하는 교인들이 신도촌을 이루고 살았다. 조선후기 가톨릭 교인들이 순교한 곳이기도 하고 한국천주교 103성인에 속하는 황석두씨의 고향이기도 하다. 지금 연풍은 당시 천주교인들을 고문하고 살상하던 터를 연풍성지로 조성하였고, 풍속화가 김홍도가 3년간 근무했던 동헌이 연풍초등학교에 남아있다. 슬픈 사연에도 불구하고 소백산맥에 살포시 감싸인 아름다운 마을 연풍에 가면 황석두 성인을 만나고, 이름 없는 의병들과 화가 김홍도를 만나날수 있다.  


연풍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조선시대 풍속화가로 이름을 떨쳤던 단원 김홍도다. 김홍도는 46세의 나이로 그의 마지막 벼슬살이인 연풍현감이 되었다. 현감으로 있을 당시 몇 년간 삼남지방을 휩쓴 가뭄을 현명하게 극복해내기는 했으나 매사냥을 일삼으며 사람을 동원했다는 탄핵을 받고 3년여를 봉직하다 물러났다. 그의 자화상격인 “호귀응렵도”는 바로 연풍현감 시절에 즐긴 매사냥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그런데 김홍도가 연풍현감 시절 10개월 동안 행적이 보이지 않는다. 당시 김홍도는 정조임금의 밀명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슈사이 샤라쿠라는 이름을 가진 화가로 활동했었다는 학설이 제기되어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도슈사이 샤라쿠는 일본 에도시대에 활약했던 화가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와 함께 세계 3대 초상화가로 불리운다. 1794년 5월 갑자기 나타나 10여개월 만에 140여 점의 그림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 신비의 인물이다. 고흐 등 유럽 인상파 화가들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친 샤라쿠의 존재를 놓고 그간 갖가지 추측이 난무했다. 일본에 샤라쿠로 추정되는 사람이 30여 명이고, 연구서만도 1백여권에 이를 정도로 일본 화단에서 절대적인 연구 대상이다. “일본 화단의 신”으로 까지 추앙받고 있는 그 샤라쿠가 바로 김홍도였다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샤라쿠가 김홍도 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은 국내에서도 있었다. 우선 정밀하고 해학적인 화풍으로 볼 때도 그렇지만, 특히 샤라쿠가 일본에 등장해서 활동했던 시기와 김홍도가 조선에서 증발했던 시기가 절묘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이 신빙성을 더해 주었다. 실제로 연풍 현감이었던 1794년 무렵 김홍도는 내놓은 작품도 없고 행적도 묘연하다.


1998년 일본 도쿄에서 <또 한사람의 샤라쿠>를 출간한 이영희씨에 의하면 단원은 정조가 일본에 보낸 스파이였다. 일본과 30년간 통신사의 왕래가 없어 일본 상황이 궁금했던 정조가 화약을 비롯한 일본의 병기 상태를 김홍도로 하여금 그려 오라고 시켰는데, 일본에 잠입한 김홍도가 여비를 비롯한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샤라쿠란 이름으로 인물화를 그렸다는 주장이다.


이와 관련하여, 1996년 일본 아사히 TV는 도슈사이 샤라쿠가 바로 단원 김홍도라는 가설을 바탕으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심층 취재한 <또 하나의 샤라쿠>라는 기획 프로그램을 방영해 일본인들 사이에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며, 2003년 국내의 한 영화 제작사가 영화화 계획을 발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현재 이 영화는 제작도중 환율 상승에 따라 잠정적으로 촬영이 연기된 상태이다. “도슈사이 샤라쿠“는 과연 연풍 현감 김홍도였을까? 이러한 주장이 “하나의 가설”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정설이 될 것인지 한일 양국 학계의 과제로 남아있다.

 

 

잠시 휴식 후 로프를 타고 또다시 급경사의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걷는다. 어느덧 사물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하며 새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여전히 가을바람은 매섭게 불어온다.

주변이 빠르게 밝아지고 있다. 갈길이 아무리 바빠도 잠시 구경은 해야하지 않겠는가? 조망바위에 앉아 주변을 조망한다. 이렇게 날이 밝아져 사물이 보이기 시작할 때는 환희로움이 있다. 저멀리 크게 지나는 능선의 윤곽선이 검푸르게 보인다. 바로앞에 부봉, 담 구간에 가야할 포암산, 그리고 마역봉 넘어 월악산과 그 주변능선들이 너무도 장엄하다.... 앉아있는 동안 하늘이 붉게 물든다. 무박 산행의 커다란 자랑은 역시 황홀한 일출이다. 그러나 오늘은 멋찐 일출을 보지 못하지만 나름 운치있는 풍광을 보여준다. 

 

이제 앞에 보이는 깃대봉을 넘어 조령3관문으로 진격한다. 배도 고프고 몹시 춥다. 조금만 참자... 내려가서 편안한 식사를하자... 다시 험한 암릉 구간을 로프를 타고 오른다. 가까스로 오른 깃대봉삼거리에서 잠시 고민에 빠진다. 깃대봉은 그 모습이 깃대처럼 뾰족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올라갔다오면 10분이면 돼건만... 왜이리 귀찮은지... 이글을 쓰면서 이렇게 후회할껄...


완만하게 오르락 내리락 하는 길을 지나는 동안 경쾌한 새소리가 들린다. 아침의 맑은 숲 내음을 맡으며 조령3관문에 도착한다. 이제 밥먹자....

 

 

우리 조상은 백두대간 산줄기에 수많은 고갯길을 만들며 서로 문물과 정을 교류했다. 남한 땅에만 해도 대관령, 조령, 추풍령, 여원재 등 백두대간은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큰 고개를 많이 거느리고 있다. 이 가운데 조령(새재)은 조선 태종때에 개척되어 조선왕조 5백년 동안 가장 중요한 통행로이며 고갯길의 대명사로 그 명성을 지켜왔다. 조령은 여러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그중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높은 고개”라는 유래가 가장 흔히 알려져 있다. 그래서 새재다. 조령은 새재를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새재는 지금이야 3-4시간이면 충분히 넘지만, 당시에는 몹시도 험하고 높아 반드시 대낮에만 넘었다. 또 도적들이 들끓어 낮에도 혼자서는 넘지 못하고 사람들이 모여 함께 넘었다. 육로 보다는 수로가 발달했던 시절, 영남의 선비나 장사치들은 낙동강 수로를 따라 문경까지 와서 새재를 넘어 충주에서 뱃길을 이용해 한양으로 갔다. 영남대로라 불리며 조선 후기까지 큰 영화를 누렸던 이 길은 일제시대 이화령이 뚫리면서 옛길로 남게 되었고, 지금은 문경새재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옛길의 추억을 되새겨보는 길로 변하였다.


그러나 문경새재는 충북 괴산쪽의 입장에서 보면 아쉬움이 많다. 전국으로 널리 알려진 “새재”라는 이름을 경북 문경이 선점한 상태라 괴산쪽 충북 사람들은 입에 힘을 주고 “조령”이라고 고집하고 있다. 문경은 옛길을 흙으로 복원하고, 드라마 촬영장을 끌어들여 대박을 터뜨렸으나 괴산은 예나 지금이나 상대적으로 한산하다. 조금은 아쉬운 얘기지만 드라마 촬영장 오픈 세트를 지을 당시 촬영팀에서 괴산에 먼저 세트장 건립을 제안했으나 이를 거절하는 바람에 문경으로 넘어갔다는 얘기가 있다.


조령관 왼쪽에는 물맛이 그만인 “조령약수”가 있다. 이 약수는 조선 숙종때 조령성을 구축시 발견한 약수이며, 그 옛날 우리 선조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으로 향할때는 새로운 다짐과 각오로, 금의환향 할때는 안도하는 넉넉한 마음으로 이 감로수를 마시면서 갈증과 피로를 달래었을 것이다.

 

 

식사 후 마역봉으로 출발한다.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어차피 예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즐겁게 맞아보자... 마역봉 오름길은 가파르다. 천천히 힘들지않게 오르니 이내 마역봉 정상이다. 마역봉은 마패봉이라고도 부르는데 암행어사 박문수가 이산을 넘으면서 마패를 걸어놓고 쉬어 갔다는 데서 유래 되었다.


계단이 잘 설치된 내리막길을 걸어가니 좌측으로 성터가 있다. 북암문을 지나 완만한 산길을 오르락 내리락 하며 걷는다. 비교적 평탄한 길을 한동안 걸어가서 동암문에 도착한다. 이곳부터 편청재까지 후미그룹은 재미난 에피소드를 만들었다 ㅋㅋㅋ 가까스로 평천재에 닿아 늦은 점심 식사를 한다. 이것은 마치 비를 맞으며 한기를 느끼며 살기위해 먹는 밥이다.

 

 

이제 마지막 봉우리 탄항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힘겹게 젖먹던 힘을내어 몇개의 봉우리를 넘으니 탄항산 정상이다. 탄항산은 세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서 있다 하여 월항삼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남북으로 수려한 부봉과 포함산이 웅장하게 서 있어 백두대간 종주자들에 의해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산 정도에 불과한 산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아름드리 구불텅한 장송들과 하늘솟은 암봉들은 나름대로 산행의 재미를 만끽해 주기에 충분한 산이다.


잠시 휴식을 마치고 하산 길에 접어들자 완만한 숲길이 이어지고 있다. 비바람이 불어와 시원함을 느끼며 하늘재에 도착한다. 그리고 좌측으로 신라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신비스러운 이야기를 담고있는 탄항산 기슭에 자리잡은 충북 충주시 미륵사지에 도착한다.

 

 


함께하신 대전2030산악회 “백두대간종주대“ 여러분 수고 셨습니다. 담 산행에서 뵙겠습니다....


- 간 첩 올림 -

출처 : 대전2030산악회
글쓴이 : 간첩^^ 원글보기
메모 : 이화령 ~ 하늘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