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untains[白頭大幹]

[스크랩] “한강과 낙동강은 백두대간에서 발원한다”

Eugene Lee 2010. 3. 2. 22:31

 

 

 

■ 산행일자 : 2010년 02월 28일 일요일

    

■ 산행경로 : 화방재 - 만항재 - 함백산 - 은대봉 - 두문동재 - 금대봉 - 비단봉 - 매봉산 - 피재 

■ 산행거리 : 22km 내외  

■ 산행시간 : 10시간 (후미기준 식사 및 휴식포함)

■ 산행인원 : 백두대간종주대 24명 

 

 

대전을 출발한지 4시간이 넘게 달려 오늘에 기점 화방재에 도착한다. 어제 하루종일 비가 내려서인지 산행 준비를 마치고 하늘을 쳐다보니 뿌연 안개가 가득하다. 푸른 스레트 지붕 민가를 옆에 두고 산행에 들어 선다. 왼쪽에 민가는 사람이 거주하는 가정집 처럼 보이고, 오른쪽 민가는 사람이 살지않는 폐가이다.


화방재는 강원도 태백과 영월의 경계이며, 31번 국도가 지나는 해발 950m의 고갯마루이다. 또한 북쪽으로 정선쪽 고한, 사북 지방으로 이어지는 414번 도로가 갈라져나가므로 삼거리가 되는 셈이다. 예전에는 화방재 부근에 철쭉과 야생화가 많아서 “꽃방석 고개“라는 예쁜 이름의 화방재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 화방재를 일명 어평재라고 하며 현지인들은 오히려 어평재로 많이 부르고 있다.


예전에 영월에 유배되어 와 있던 소년왕 단종이 그의 삼촌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그 혼령이 태백산 산신이 되기 위해 태백산을 향해 오다가 잠시 쉬었던 곳이라하여 어평마을이 되었고, 그 어평마을이 바로 이곳 화방재 부근에 있어서 그 이름을 따라 어평재라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비탈진 산능선을 오르니 좌측으로 함백산에 오로는 도로가 보인다. 그길을 따라 가면 만항재가 나오고 함백산도 갈수 있지만 찻길이라 더 멀고 대간길과는 동떨어진 길이다. 전나무숲을 지나는데 간밤에 눈이 얼마나 왔는지 온통 상고대가 활짝 피어있다. 이렇듯 새하얀 눈꽃세상을 걸으니 황홀하기 그지없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비탈진 경사면을 올라오니 다시 완만한 능선이 펼쳐지고 다시 비탈진 경사면이 기다리고 있다. 급경사를 오르니 오늘의 최초의 봉우리 수리봉이다. 수리봉 정상석을 배경으로 사진 한장씩 남기고 약간에 휴식과 함께 땀을 식힌다. 주위는 잡목으로 인하여 조망은 전혀없으나 여전히 화려한 눈꽃세상이 우리의 눈을 호사하스럽게 만든다.


약간의 능선위를 오르면서 가다보니 어림잡아 정상석이 없는 창옥봉이다. 여기부터는 그리 높지 않은 능선 길이라 산행 속도가 빠르다. 주위는 여전히 잡목으로 인하여 조망을 못한다. 미끄러운 빙판길을 조심스럽게 진행하다보니 어느덧 만항재가 얼나남지 않았다. 등로는 끊기고 철조망 옆을 따라 가다보니 군사시설 나오고, 이곳에서 부터는 임도길이 나온다. 임도길을 따라 내려가니 군사시설 정문이다. 그리고 아스팔트 포장 도로가 나오니 바로 만항재다.

 

 

만항재는 영월과 태백을 이어주던 해발 1,330m의 높은 고개로 우리나라에서 포장된 도로로는 가장 높은 고갯마루다. 이곳 만항재는 정선과 태백 사이에 두문동재터널이 생기면서 교통 요지의 기능을 잃었다. 대신 고지대의 특성을 살려 수년 전부터 야생화 축제를 열고 있는데 8월에 찾아가면 고갯마루를 뒤덮은 꽃밭에 흠뻑 빠질수 있다.


만항재 쉼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가니 함백산 등산로 입구이다. 지난주에도 이곳에서 산행을 하였건만 온통 세상을 뒤덮었던 그 많은 눈은 일주일세 다 녹아버려 보이지 않는다. 그 많던 눈이 다 녹아 다 어디로 흘러갔단 말인가?


초반의 오르막을 힘차게 치고 오르기 시작한다. 봉우리 능선에 올라서니 밋밋하다.  능선을 내려서고 잠시 포장도로를 따라 걸으니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직진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가면 국가대표 훈련원 태백분소가 나온다. 태백 훈련원은 국가대표선수들의 고지대 훈련을 통한 심폐기능 강화와 경기력 향상을 위하여 건립하였다고 한다.


함백산 정상으로 가는 등로에 접어든다. 오르고 또 오르니 힘이 부치기 시작한다. 정상이 눈앞에 아른 거리니 이를 악물고 오른다. 정상 가까이 오르며 뒤를 돌아보니 지난주에 보았던 하얀세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함백산 정상에 올라서니 국가대표 훈련원 태백분소 건물과 운동장이 보이고, 옆에는 통신탑이 서있다. 올라온 방향으로 안개에 가린 태백산이 아련히 보이고 만항재 뒤로 백운산과 두위봉이 멋진 장관을 연출한다. 또한 가야할 방향으로 두렷하지 않지만 은대봉, 금대봉, 매봉산이 멋진 자태를 뽐내며 어서 오라 손짓하고 있고, 산 허리에는 주목 군락이 어서 내려와 감상하라 하고 있다.


함백산은 태백의 진산이다. 강원 동부의 최고봉으로 우리나라에서 여섯번째로 높은 산이며 크고 밝은 산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산이다. 이런 산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심하게 훼손되고 오염된 산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정상부에 각종 방송통신시설 중계탑이 즐비하고, 도로가 정상 턱밑까지 파고들어와 있는가 하면, 산 중턱엔 국가대표선수 고지 훈련장이 있으며, 산자락은 채탄작업을 하는 등으로 심하게 훼손되었다. 최근에는 함백산 동쪽 자락에 스키장을 만들어서 더욱 훼손과 오염을 부채질했다. 이런 형편이지만 함백산은 워낙 장대한 산이어서 이런 훼손과 오염을 감내하면서 꿋꿋하게 버티고 서있다.


함백산을 출발하니 내리막길이다. 등로에 철조망이 쳐있으며 그 안은 주목나무 군락지다. 아마도 주목나무를 보호하기 위함인듯하다. 고목들이 있는 숲길을 따라 가다 보니 분재원 같이 멋진 장관의 고목 및 주목 나무를 볼수가 있다. 이러한 길을 가다 보니 약간의 오르막이 나오고 오르막을 오르니 여기가 중함백이다.


정상석이없는 중함백을 지나 제3쉼터가 나오고 여기서 가야할 은대봉 등 강원도의 육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난주에 온통 눈에 덮여있던 등로는 모두 녹아버려 질퍽이기 시작한다. 한걸음 한걸음 진흙길을 걸으니 진행이 더디기만 하다.


진행방향에서 좌측으로 적멸보궁 정암사로 갈수있는 제2쉼터를 지나고 비교적 평탄한 길을 가다 보니 좌측 정선쪽 방향에 카지노가 들어서있는 고한읍이 보인다. 제1쉼터를 오르니 약간의 오르막이 나오며 힘들게 한다. 힘을 들여 오르니 헬기장이 나온다. 은대봉 이다. 은대봉은 일명 “상함백“이라고도 하는데 정상은 널따란 헬기장이고, 아담한 표지석과 삼각점이 있으며, 사방이 잡목에 가려 시야는 막혀 있다.

 

 

은대봉 정상 헬기장에 모여 사진을 찍으며 휴식을 취한다. 은대봉을 출발하여 완만한내리막을 내려서니 두문동재와 금대봉, 매봉산이 한눈에 들어 온다. 두문동재까지 미끄러운 급경사 내리막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온다.


두문동재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 유신들이 불사이군의 지조를 지키려고 개성 부근의 두문동에 숨어들어 갔다가 이성계 일파가 불을 지르는 바람에 대부분 타 죽고, 살아남은 일곱 사람이 이곳에 숨어 들어와 살면서 두문불출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두문동재에서 정선방향 고한쪽으로 내려가다가 오른편으로 들어가면 “옛 두문동재” 아래에 “소두문동”라는 이름으로 작은 마을이 아직 남아 있다. 이들 고려 유신들이 부른 한시와 당시 정선 지방에 구전되던 토속민요가 합쳐져서 “정선아리랑“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런 사연들이 있어서 현지인들은 이 고개를 싸리재라 하기보다는 두문동재라고 많이 부른다.


두문동재를 출발하여 임도를 따라 가다가 능선 대간길로 접어든다. 약간의 오르막을 오르다 보니 금대봉 정상에 도착한다. 금대봉 정상에는 조그마한 정상석이 서있고, 나무 표지목에는 “양강 발원봉”이라 적혀 있다. 그 옆에는 산불 감시 초소가 2층 철제로 설치되어 있다. 금대봉 정상석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남기고 산불 초소에 올라가 주위를 관망하니 강원도 산의 진미를 느낄수 있다.


금대봉과 인근의 대덕산은 1993년 환경부에 의해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을 만큼 산보다 들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더욱더 유명한 산이다. 금대봉 북동쪽 골짜기에 있는 검용소는 한강의 발원지가 되고, 남동쪽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은 태백시내 황지에 모여 낙동강의 시원이 된다. 강의 시원이라는 江原道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산은 물을 가르고, 물은 산을 거스르지 않는 산자분수령의 이치에 따라 한강과 낙동강이 태동하여 기나긴 생의 여정을 시작케 하는 어머니의 산이다.

 

 

전라, 경상, 충청을 가로지른 백두대간 마루금이 이제 진정 북으로 향한다. 남녘 구간의 대미를 장식하는 강원도. 한국 사람 대다수는 이곳 강원도에 빚을 지고 살아왔다. 산업화 시대엔 광부들이 석탄과 시멘트를 쏟아냈다. 농부와 어부들은 청정 해산물과 고랭지 채소를 도시로 날랐다. 나라 전역에 개발의 폭풍이 불어닥치고 토박이들은 대대로 살아온 터전과의 이별을 강요당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강원도는 그렇게 축나고 멍들었다.


강원도에서도 남부 내륙에 위치한 태백은 백두대간과 낙동정맥 연봉들로 둘러싸여 있는 고원성 산지로 전 지역이 높고 험준하다. 이렇듯 큰 두 산줄기의 160리 품에 안겨있는 태백은 “하늘 아래 첫 고을”이요, 우리나라 최고의 산국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고을이다. 산이 높으니 당연히 이웃 고을로 넘어가는 고갯길도 높다. 영월로 통하는 화방재, 정선으로 가는 두문동재와 피재, 삼척으로 가는 느릅령 등 태백으로 이어진 고개들은 모두 해발 900m를 넘나든다.


태백은 과거에 험한 산줄기로 둘러싸여 있어 접근이 쉽지않고 낙동강을 거슬러온 은어떼가 여울을 튀어오르는 장관을 이루었다고 하니 이상향으로서 전혀 부족함이 없는 고을 이었다. 그야말로 무릉도원이라 아니 할수없다. 만약에 일제강점기때 태백에서 석탄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태백지역은 아직도 작은 산골마을로 남은채 21세기의 무릉도원으로 각광을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20세기 태백의 역사에서 “검은 황금“ ”검은 노다지”로 불리던 석탄을 빼놓고는 태백을 이야기 할수없다. 태백은 정선의 도계탄전과 더불어 남한 최대의 탄전지대이다. 이 일대에 넓게 분포하는 질 좋은 무연탄이 매장되어 있어 일찍부터 개발이 시작 되었다. 6.25전쟁 이후 대한석탄공사가 발족되어 국영화 되었고 석탄, 고령토, 납석, 철, 기타 여러가지 지하자원이 태백선과 영동선을 통해 전국으로 수송되었다.


태백은 석탄 덕분에 60~70년대 “개도 입에 만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이 나라가 산업사회로 본격 진입하면서 석탄 개발이 활성화되자 전국에서 돈을 좇는 수많은 사람들이 화방재와 두문동재 같은 높고 험한 고개를 넘어왔다. 호랑이를 무서워하던 화전민들만 산기슭 여기저기 흩어져 살던 이곳 태백에 무려 12만명이 넘는 인구가 흘러들어 왔고, 이들은 함백산, 태백산, 연화산, 백병산 등의 산자락을 파헤치면서 “불을 일으키는 검은 돌”을 캐내 이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몸을 따뜻하게 녹여주었다.


그후 수십년의 호황기가 지난뒤 1990년대 들어서자 정부의 석탄합리화정책으로 50여개나 되던 탄광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더불어 많은 광부들은 태백을 떠났고 가파른 언덕배기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탄광촌 사택들은 거의 빈집이 되었다. 지금 태백에서 그나마 이름을 유지하며 채탄작업을 하고있는 탄광은 한보탄광, 대덕탄광 등 한손으로 꼽을 정도의 수로 그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다. 이제 태백은 지난 세기와 금세기를 이야기하는데 결코 석탄을 빠뜨릴수 없는 잊혀져가는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태백에 시가지가 형성되고 태백시로 승격된 것은 오로지 탄광 덕분이었고 따라서 당연히 태백의 사회, 경제사는 탄광을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이면엔 슬픈 현실이 도사리고 있었으니, 시내 중심부의 연화산 자락에 세워진 산업전사위령탑이 그것이다. 그곳엔 광산에서 일하다가 죽어간 수많은 광산노동자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제 태백과 정선쪽 고한, 사북으로 이어지는 골짜기에 흉물처럼 늘어서 있던 광부들의 사택은 대부분 철거 되었다. 그러나 70∼80년대 연평균 170명씩 죽어나간 탄광촌의 상흔까지 치유된 것은 아니다. 죽음의 도시에서 용케 살아남은 이들은 불치병으로 알려진 진폐증과 싸우고 있다. 안전장비도 없이 막장으로 내몰렸던 그들은 한때 조국 근대화의 기수로 불렸다. 이제 병든 몸으로 최소한의 생계유지를 요구하는 그들 앞에 우리는 마땅히 예의를 갖춰야 한다.


태백중앙병원은 1936년 한국 최초의 산재병원으로 설립됐다. 이곳을 거쳐간 광부만 무려 470만명이다. 지금도 병실에 누워있는 퇴역 광부들은 세상에 대한 희망이나 기대는 없다. 그들은 그렇게 늙은채로 마지막 순간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병원 입구에 새겨진 어느 전직 광부의 시는 보는이로 하여금 가슴을 물클하게 한다.... “내게도 굵고 단단한 팔뚝 자랑하던 때가 있었다. 내게도 뜨거운 사랑 가슴에 품었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내게도 겁날게 없던 그런 젊은 날이 있었다. 지금은 비록 산소호흡기에 연명한 목숨이지만 나도 한때는 자랑스런 산업역군, 산업전사였다. 지금은 GNP 2만불을 얘기하는 시대. 사람들은 어느새 광부라는 말조차 잊고 있다. 전쟁터 같은 막장 도급제 노동으로 진폐증 환자가 된 사람들을 까맣게 잊고 있다.”

 

 

금대봉에서 부터 쑤아밭령 까지는 완만한 내리막 길이 이어진다. 어쩌면 가장 편한 코스중에 하나다. 이곳 일대가 생태 보존 구역으로 지정하여 놓아서인지 대간길 중간 중간에 흰 플라스틱으로 표시를 해놓았다.


용연동굴, 검용소, 금대봉, 쑤아밭령 사거리가 나온다. 좌측으로 가면 검용소 우측으로 가면 용연동굴이 나온다. 검용소는 한강의 발원지가 되는곳으로 1987년 국립지리원에서 도상실측 결과 최장 발원지로 공식 인정되었다. 검룡소에서 쏟아지는 물은 정선의 조양강, 영월의 동강, 단양, 충주, 여주로 흘러 경기도 양수리에서 합류되어 임진강과 합류한 뒤 서해로 들어간다.


쑤아밭령을 통과하고 비단봉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급경사의 오르막을 숨가쁘게 오르다 보니 봉우리 하나를 오르고, 잠시 평탄한 길이 이어지더니 다시 급경사의 오르막이 시작된다. 봉우리 정상 직전에 전망 좋은 바위가 나오니 비단봉이다. 주위를 조망하니 벌써 해가지고 있다. 저 멀리 함백산 통신탑과 두문동재가 한눈에 들어 온다. 잠시 감상을 마치고 비단봉 정상을 지난다. 조금을 내려가니 고냉지 채소밭이 펼쳐진다.


비단봉 비탈에서 매봉산 코밑까지 광활하게 펼쳐지는 채소밭은 배추가 재배되는 곳이다. 비록 지금은 배추의 푸르름를 볼수없는 계절이지만 이 드넙은 땅이 경이롭다.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를 매일같이 들어야 하는 시절. 그 시절 자연은 공존해야 할 벗이 아니라 개간의 대상이었다. 울창한 소나무 대신 배추가 심어졌고 산은 밭이 되었다.

 

 

60년대 박정희 정권은 산속에 흩어져 살던 화전민들을 한데 모으기 시작했다. 강원도 여러 산간지대에 흩어져 살던 화전민을 모아 이곳을 개간하게 했다. 그 당시 무장공비들의 잦은 출몰로 인해 야산을 정리하여 그들의 은신처를 차단하는데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 고랭지 농사를 권유했다. 이곳은 황무지를 채소밭으로 개간한 화전민들의 애환이 담겨져 있는 곳이다.


산을 개간하는 일은 힘들었다. 더구나 눈이 내리면 고립되는게 다반사였던 시절이었다. 헬리콥터로 공수된 음식을 먹으면서 어려움을 견디지 못한 이들이 떠나기도 했지만, 많은 사람은 의지를 꺾지 않았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화전민들의 노력은 구릉을 일구면 자기 땅을 가질수 있다는 희망에서였다.


이곳에서 재배한 배추는 서울 가락동 시장에서 일급 대우를 받는다. 이곳 배추의 맛이 뛰어난 가장 큰 이유는 사과 같은 과실과 마찬가지로 일교차가 심한 덕분이라고 한다. 오늘은 조금은 아쉽지만 요즘같은 겨울에는 알프스에서나 접할 순백의 설원이 이곳의 매력을 더한다. 이국적인 풍경에 취하려는 사진작가와 여행자들이 가파른 언덕을 굳이 오르는 이유다. 부지런한 농부들은 벌써 다가오는 봄을 준비한다. 어둠이 가시기 시작한 밭에는 비료가 산처럼 쌓여 있다. 정상까지 점령한 어마어마한 크기의 고랭지 배추밭에 뿌려지는 농약의 양은 얼마나 될까? 그 농약들은 다 어디로 흘러가는가? 그것이 갑자기 궁굼해진다 ....


오늘 산행의 막바지에 든 느낌이다. 고랭지 밭을 통과하여 시멘트 포장도로를 가다가 창고가있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 농로길로 밭 상부까지 치고 올라간다. 배추밭이 비 때문인지, 녹아버린 눈 때문인지 토사가 하부로 씻겨내려가 흉물스러운 곳도 간혹 눈에 뛰게 보인다.

 

 

대간길까지 밭으로 변한 길을 따라 매봉산으로 오른다. 매봉산 비탈에 설치된 대형 정상석과 6기의 풍력발전기가 위풍당당하다. 드넓은 배추밭 아래로 해가지고 어슴프레한 부드러운 산줄기들이 풍력발전기와 함께 이국적인 풍경을 자랑한다.


볼거리를 제공하는 이 거대한 풍차단지 때문에 “바람의 언덕“이라는 지명도 붙었다. 한국관광공사가 가볼 만한 관광지로 꼽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바람개비 모형물과 대형 풍차를 배경으로 한 기념사진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을수 있다.


이제 피재까지는 내리막 길이며 그렇게 힘든 코스는 아니다. 밤은 완연히 어두워졌고 강한 바람이 불어 추위가 엄습해 온다. 시멘트 포장길과 아스팔트 포장길을 번갈아 걸으며 오늘에 종점 피재에 도착한다.



함께하신 대전2030산악회 “백두대간종주대“ 여러분 수고 셨습니다. 담 산행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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